가진 게 많다

2025년 6월 어느 날 쓴 글
저녁 식사를 하다가 문득, "우리는 참 가진 게 많다"는 주제로 와이프(정은이)와 대화했다.
문득 떠오른 생각이지만, 어찌 보면 '가진 게 많다'는 생각을 하기에 딱 적당한 시점이었다. 지나온 20대에는 세상을 충만하게 경험했고, 이제 막 절반이 지난 30대에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으니까.
물론 2022년에 미국으로 이민 온 후 1년 넘게 경제적 위기를 겪은 것도 2025년 오늘의 우리가 '가진 게 많다'고 생각하는 데에 한몫했을 것이다. 여전히 이 지역(캘리포니아 얼바인)에서 우리의 현재 경제력은 하위권이지만, 가진 게 많다고 느낀다.
저녁 식사 중 5살 수지와 3살 지호가 마주 보고 웃고 떠드는 틈을 타서, 정은이와 나는 '우리가 무엇을 가졌는지' 하나씩 따져보기 시작했다.
존재
-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배우자
-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여운 딸과 아들
- 건강하시고 존경스러운 양가 부모님들
- 행복한 가정을 이룬 정은이 시누이와 내 처남
- 지난 9년간 순한 양처럼 우리 곁에 함께한 반려견 하루
- 10대, 20대, 30대를 함께한 좁고 깊은 친구들
- 미국에서 알게 된 좋은 사람들
관계
- 14살에 학원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고, 20살부터 연애하고, 27살에 결혼한 정은이와 나의 (조선왕조실록 분량의) 추억 보따리
- 싫어하는 것들이 비슷해서 거의 충돌하지 않는 정은이와 나의 가치관. → 같은 것을 좋아하는 것보다, 같은 것을 싫어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더라.
- 아들보다 며느리를 더 사랑하는 시댁과 사위를 아들처럼 아껴주시는 처가. → 특히 시댁과 며느리의 관계가 이렇게나 좋은 경우는 드문 것 같다.
- 잉꼬부부 그 자체인 장인 장모님과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정은이
-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우리 엄마와 나만큼 우리 엄마를 존경하는 정은이
-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 사이처럼 편하게 욕부터 박고 시작할 수 있는 찐친들
- 다양한 삶의 모습을 살아가는, 만나면 언제나 흥미로운 서울대 체육교육과 동기/선후배들
역량
- 진정한 행복을 추구할 줄 아는 능력 → 남들과 비교하면서 행복을 느끼거나 불행을 느끼지 않고, 우리 삶의 본질에 집중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능력
- 체대생(나)과 미대생(정은이)의 타고난 예체능 신경 → 미국에서 자랄 아이들에게 특히 도움 될 능력들
- 높은 자존감과 자기효능감 → 남들을 깎아내리는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, 새로운 분야에 과감하게 도전
- 검소하고 사치하지 않는 정은이 덕분에 나까지 갖추게 된 검소함
-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으로 부(富)를 측정하는 능력 → 관계, 신체, 마음가짐이 건강해진다.
- 노트북과 시간만 있으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고,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직업(소프트웨어 엔지니어) → 덕분에 미국으로 이민 올 수 있었다. 원하면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도 살 수 있고, 일하는 시간과 장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직업
- 지난 4년간 어린이집도 보내지 않고, 미디어 노출도 없이 수지와 지호를 혼자서 풀타임 케어해온 정은이의 육아 능력과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 → 어린이집 + 학원 뺑뺑이와 미디어 노출로 조금은 편하게 육아할 수 있는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엄마
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.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데 가지지 못한 것들을 나열하자면, 사실 잘 떠오르지 않는다. 억지로 떠올려보자면,
- 내가 7살 때 돌아가신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함께했을 7살 이후의 추억
- 부모/형제에게 마음껏 경제적 도움을 주어도 될 수준의 경제력
- 가창력? (ㅋㅋ)
평생 행복을 연구한 교수가 쓴 『행복의 기원』 이라는 책에서 행복의 핵심을 한 장의 사진에 담는다면 그것은 '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장면'이라고 했다.
필연적으로 '우리는 참 가진 게 많다'는 문장이 떠오른 순간도 그 장면이었다.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저녁 식사 시간.
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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